시간이 흐르면 많은 기억은 희미해지고, 또 어떤 것은 사라진다.
하지만 때로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 있다.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을 지킨 젊은 그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적진에 산화한 영혼들.
그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음을 ...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으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온다.
개전 초기부터 북한 공군은 용산역. 서울 공작창. 통신소 등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시작으로 김포비행장, 여의도비행장을 공습해 우리 공군과 미군의 항공기를 파괴하는 피해를 입혔다.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공군은 항공정찰 등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지만 결국 전쟁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된다. 전쟁터로 변한 한반도는 공군의 힘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방어선이 계속 밀리는 가운데 16개국으로 구성된 UN군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다. 공군 참전국은 미국 극동공군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캐나다 등 6개국이었다.
UN공군은 가장 치열한 낙동강 방어전을 비롯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대한민국 공군도 미군에게 F-51전투기를 지원받으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우리 조종사들은 1인당 20-30분, 그것도 단 1회의 훈련 비행만으로 F-51전투기 10대를 주일미군으로부터 인수해와 제대로 된 훈련과정도 거치지 못하고 다음 날인 7월 3일 첫 출격을 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 공군은 UN 공군과 합동으로 뛰어난 전과를 세우기 시작한다.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대한민국 공군의 활약은 계속된다.
유엔 공군의 일원으로 북한에서 서울로 오는 철도를 차단해서 전력과 보급물자가 투입되지 못하도록 하고,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적 비행장을 정찰해서 지상에 계류된 항공기를 찾아내 파괴하는 작전에 참여한다.
아측 공군의 강도 높은 항공지원과 지상군의 반격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가운데, 낙동강 전선에서도 완강하게 저항하던 적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 UN 공군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대한민국 공군은 최초로 단독작전을 펼치게 되고, 11월에는 평양의 미림 기지에서 C-47 수송기를 인수해 공군의 보급품 지원과 환자공수 등의 임무까지 수행하게 된다.
대한민국 공군의 능력과 성장을 유엔군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평양을 탈환하고 통일을 눈앞에 뒀다고 모두 믿던 1950년 10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유엔군에 뺏긴 제공권을 얻기 위해 최신 미그 전투기들이 한반도에 들어온다.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공중전이 본격화되면서 전쟁의 승패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 속에서 유엔 공군은 전력을 총동원해, 적의 비행장을 폭격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철도 차단 작전에 들어간다.
여기에서도 대한민국 공군의 활약은 돋보였다. 대표적인 세 가지 전과 중 하나가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의 보급물자 수송로 요충지로 유엔 공군이 500회 이상 출격했음에도 적의 강력한 대공포 방어 때문에 폭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공군은 23회 출격해 450미터 초저고도 공격으로 완파하면서 그 초인적 용맹성을 대내외에 과시한다.
두 번째 성과는 1952년 8월 29일에 있었던 평양대폭격 작전이었다. 북한에 심리적 타격을 줘 휴전 협상에 응하도록 하기 위한 이 작전에서 대한민국 공군기 36대는 목표물 폭격을 완벽하게 성공하면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세 번째는 351고지 근접항공지원작전! 1952년 7월 10일부터 휴전협정이 이뤄지는 순간까지 351고지 및 고성지구에서 f-51 전투기로 약 1538회 출격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현재 38선 북쪽인 설악산과 속초지역 및 간성, 거진 지역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초기엔 장비도 인원도 열악했던 우리 공군은 휴전 때에는 f-51전투기 78대를 포함해 118대의 항공기와 병력 11,461명으로 증강 되는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그리고 총 출격조종사 115명 중 100회 이상 출격 조종사 39명을 배출하고, 단독출격개시 이후 후방 보급로 차단작전에 5003회, 공지합동작전에 2851회 출격해 전 참전 UN공군 중 엄호율 90%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발전 뒤에는 수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안양 상공에서 적의 대공포에 맞자, 북한군 전차로 돌진해 장렬히 산화한 이근석 장군을 시작으로, 지상군 엄호작전 중 피탄되어 귀환이 불가능해지자 적진에 자폭해 임무를 수행한 임택순 대위. 김현일 대위. 재일학도 의용군으로 참전해 89번째 출격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박두원 대위 등. 조국을 위해 적지 상공에서 산화한 보라매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공군은 6.25 전쟁에서 북한군의 도발을 격퇴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통일이라는 숙원은 이뤄지지 못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뤄진다.
6.25전쟁 때 유엔군의 지원을 받았던 대한민국 공군은 꾸준히 증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하는 것을 넘어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에 적극 나섰다.
1966년 월남에 은마 부대가 파병된 것을 시작으로, 1990년 걸프전에 비마 부대.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 청마 부대 . 그리고 2004년에는 다이만 부대가 이라크 자이툰 부대와 다국적군의 병력을 공수해내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과 우수성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렸다. 또한 지진 참사가 일어난 아이티 레오간에서는 단비부대의 일원으로 의료지원을 펼치며 유엔 안정화임무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휴전 이후 60여 년간 대한민국 공군은 ‘우리의 하늘은 우리가 지킨다.’는 각오로 싸우면 이기는 강한 공군 육성에 매진해왔다.
1991년 7월 1일 방공포병사령부가 전군 되면서 완벽한 영공방위를 위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년 하늘의 절대 강자로 불리는 F-15K를 도입해 최신형 정밀유도무기를 탑재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KT-1과 초음속 T-50을 전력화 하여 선진비행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강한 선진정예공군으로의 눈부신 성장은 항공기 조종에서부터 관제, 방공포병, 무장, 정비 등 전 분야에 걸친 장병들의 노력과 유기적인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강의 능력, 최첨단 시스템과 인력은 현재 대한민국공군의 위상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창공을 넘어 우주로 나가려는 대한민국 공군은 항공우주력으로 주권을 수호하고 국익을 증진하며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는 사명감으로 ‘연합·합동전장을 주도하는 항공우주군’이라는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힘차게 도약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공군은 항공전력은 물론 감시·정찰·위성체계를 갖춘 우주자산을 활용하여 전쟁승리의 핵심전력으로서 결정적 역활을 할 것이다.
60년 전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속에서 선배전우들의 고귀한 희생과 UN군의 도움으로 조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시련과 희생의 교훈을 잊지 않고, 이제는 위대한 도약과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공군은 적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한 영공방위 태세를 유지한 가운데 세계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높은 힘! 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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